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병인박해 천주교 금지 병인박해 사건의 결과로 천주교가 금지 되었는데 천주교 금지가 민중 사회에
병인박해 사건의 결과로 천주교가 금지 되었는데 천주교 금지가 민중 사회에 어떠함 영향을 미쳤나요?
천주교를 사학(邪學; 삿된 학문)이라고 해서 금했던 것은 병인박해(1866) 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. 병인박해는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마지막의 박해였습니다. 물론 규모가 가장 크고 악랄했던 박해이긴 했지만요. 대규모 박해의 처음은 신유박해(1801)였습니다. 이 때 당시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금하는 금령을 반포하였으며 이후 이 금령을 근거로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집니다. 물론 실제 박해의 시작은 진산사건(1791) 때부터이기는 하지만 많은 수의 순교자를 낳게 되는 것은 신유박해 이후의 일이었지요.
병인박해는 1866년 병인년에 발발해서 1872년까지 대략 6년 동안 1만 명 가까운 순교자를 낸 가장 가혹했던 박해였습니다. 아이러니 하게 이 박해가 끝나고 불과 4년 후 일본에게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었고, 그 10년 뒤인 1886년에 조선이 프랑스와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및 선교활동을 공인해주게 됩니다. 병인박해가 벌어지고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죠. 그만큼 병인박해는 천주교라는 외래종교를 희생양 삼아 당시 백성들의 눈과 귀를 조선의 각종 말기적 병폐로부터 돌리게 만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.
문제는 진산사건 이후 약 백 년 정도 박해가 지속됨으로 인해 조선 민중들에게 가톨릭(천주교)은 사악한 종교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박히게 되었고 이 때문에 신앙의 자유가 생긴 다음에도 이로 이해 민중들과 여러 가지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. 이를 가톨릭에서는 '교안(敎案)'이라고 합니다. 즉 교안이란 외교적 절충을 통해 해결된 그리스도교 교회와 정부, 교인과 비교인 사이의 분쟁 및 사건을 뜻하는 것이죠. 물론 이런 교안 사건에는 1백년간 누적된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신과 오해 뿐만이 아니라,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‘洋大人(양대인; 신분 높은 서양인)’인 서양성직자의 그늘에서 엉뚱한 이득을 취하려는 자탁교인(자탁: 다른 사실을 내세워 핑계를 대는 것)이나, 관에 쫓기다 신앙과 관계없이 입교한 사이비교인들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도 있었습니다. 대표적인 것이 제주에서 벌어졌던 이재수의 난이었죠.